횡설수설

인연 시험하기

권성재 2008. 2. 4. 11:16
빙어(氷魚)..
살아서 파닥거리는 손가락 만한 물고기를 젓가락으로 힘껏 찝어서
초고추장에 푹 찍어서 몇번 휘저은 뒤,
산 채로 입안에 넣어 우적우적 씹어먹는 물고기다..
내장이 그냥 보일 정도로 몸통이 말갛다.
사는 곳도 오염안된 강원도 소양호 상류 맑은 물 속.
겨울철에만 산란을 위해 수면 가까이 올라오는.. 참 이름도 이쁘고
생긴 것도 착하게 생긴 물고기인데.. 인간과의 관계는 좀 엽기적이다.
..
지난 주부터 인제 빙어축제 가자고 옆구리 찔러댄 친구 차타고
못이기는 척 따라갔다.  몇년전 춘천 소양강댐에서 청평사 갔다가
오는 길에 먹어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 빙어 그 자체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 않은 음식이지만.. 호기심에 꼭 먹어봐야 직성이 풀릴거 같은
이 친구를 위해 같이 가 주는거다..
사실, 인제 라는 강원도 골짜기로 오랜만에 드라이브하는 것도
싫지는 않았다..
..
일요일 아침 7시. 이 꼭두새벽에 일어나 친구집으로 간 후
9시쯤 서울을 빠져나왔다. 양평지나 터널을 여러개 빠져나온 후
용문 부근에 있는 "여기가좋겠네" 라는 좀 독특한 이름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갔다.  배가 고팠다. 그보다 속이 더 쓰렸다.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어제도 소주 한병을 마셨다.
속풀려고 황태해장국을 먹었다. 태진이는 아침 먹었다면서
원두커피 한잔만 마시고..
어제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편한 사람과 먹을 때는 주량을 넘게 마셔도
잘 안취한다. 기분좋게 먹어서 그렇겠지.
시원한 국물을 마저 마시고 자판기에서 커피한잔 뽑아 마시니 그제서야
살것 같았다. 속이 풀리고 인상이 좀 펴진다..
..
한참을 더 달려 6 번 국도에서 44 번 국도로 갈아타고 계속 더 가자
강원도 사투리 섞인 멘트가 네비게이션에서 튀어나왔다.
배가 불러 잠이 솔솔 오려고 하고..  히터가 좀 더운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문득 정신이 번쩍 들어서 손으로 목 주위를 더듬더듬 만져봤다.
이런 젠장..
목도리를 휴게소 식당의자에 걸어놓고 그냥 와버렸다. 이를 어쩌나..
잠이 싹 달아났다. 그냥 목도리가 아닌데.. 차를 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지난달 크리스마스 선물받고 .. 근래 외출할 때는 한번도 빼놓지 않고..
심지어 등산할 때도 목에 두르고 다녔는데..
이번 겨울 .. 그 목도리 하나로 참 따뜻하게 보내고 있는 중인데
그걸 잊어버리다니.. 이런 한심한 .. 이런..
내가 산 물건이었다면 그냥 재수없었다며 잊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이건 그냥 목도리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자 더 집착이 갔다..
어쩔 수 없이 이따가 오후에 서울 올 때 다시 들러서 찾아보기로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어떤 징조나 기미가 아닐까..
잃어버린 목도리가 그 인연이 다했음을 미리 알려주는게 아닐까..
맘이 착잡해졌다..
내가 생각해도 억지로 무리하게  연결지어 끼워맞추는거 같았지만
맘 한구석에서 불안한 맘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옆에서 운전하던 친구가 무덤덤하게 한마디 던진다..
"왜.. 못찾으면 이제 그만 만날려고?"..
"글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짜 못찾으면 똑같은 상표, 똑같은 색상의 목도리를
하나 새로 사서라도 목에 두른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상표가 뭐였더라.. 색과 무늬는 알겠는데.. 그리고  어디서 그런걸 팔지?
한동안 정신이 혼란하더니.. 이상하게 오히려 맘이 점점 편해졌다.
그래 그냥 맡겨두자.. 흘러가는 대로.. 인연대로..
그리고 지금은 인제의 빙어만 생각하자..
..
..
언제 이렇게 강원도 도로가 좋아졌나.. 인제군까지 계속 4 차선 넓찍한 도로가 이어졌다.
별로 막힘없이 시원하게 달리다가.. 길가에 일정간격으로  세워진 빙어축제 안내간판들이 
목적지가 얼마남지 않음을 알렸다. 샛길로 빠져 축제장 들어가는 곳에서
한 20여분 정체가 됐을 뿐이다.
축제장은  소양강 호수 상류쪽 한 모퉁이 산기슭에 차려졌다.
공중에는 애드벌룬이 떠 있고 행사장 한편에서는 커다란 스피커에서
대중가요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주위에 덮혀있고 바람이 없어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물빠진 자리에 대강 평평하게 만든 넓은 주차장이 있고, 강 가까운 곳에는 천막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빙어 음식점, 눈조각, 눈썰매장, 지역토산품점,
목공예 전시장, 각설이쇼 등 제법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다.
스노우스쿠터 같은 차량에 연결된 썰매열차들이 큰 원을 그리며
행사장을 쉴새 없이 돌아다녔고,  얼어붙은 강바닥 위에는 수천명이
복작거리며 모여있었다.
얼음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 앉아서 빙어낚시를 하거나..
어린애들은 손으로 지치는 썰매를 임대해서 타고 다녔다..
얼음두께가 20Cm 넘어 보였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있어도 괜찮을까 약간
걱정도 들었다. 빙어낚시는 별로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대부분 빈 낚시대만 들고 있었다.  이 많은 인간들이 독기가 올라 잡아먹고 있으니
빙어 씨가 안마른게 다행이라며 다행이겠지..
..
적당히 둘러본 후 빙어식당 한 곳에 들어갔다.
절반은 빙어튀김, 절반은 산 빙어회를 시켰다. 소주도 한 병.
태진이는 운전해야하므로 한두잔만 마시고 나머지는 내가 다 마셨다.
물그릇에 담겨 헤엄치고 있는 수십마리 빙어를 보고 차마 먹을 맘이 안생겼는지
우선 튀김에만 열심히 젓가락질 하며 내가 먹는걸 보기만 하더니
드디어 큰맘 먹고 한마리를 씹어 먹었다. 표정이 별로다..
이 친구도 비위가 좋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암튼 소원은 풀었겠지..
뼈가 약해서 입에 넣고 씹어도 별로 걸리적거리는 데가 없다. 맛도 비린 맛이 거의 없다.
주인아주머니 말로는 단맛이 난다고 하는데 솔직히 단맛까지는 아니다.
맨정신에 많이 먹기는 좀 힘들겠지만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면 소주 안주로는 그만일 듯하다.
지느러미에 묻은 초고추장을 얼굴에 뿌리며 빙어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을 했지만.. 결국 한그릇 모두 뱃속으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술깨느라 얼어붙은 강 건너편까지 걸으며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눈덮힌 강바닥을
한참 더 돌아다니다가.. 넓은 주차장에서 차 찾느라 헤맨 후,
비포장 우회도로를 한참 달려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다시 서울로..
..
도로 막힐걸 염두에 두고  3시도 안되서 좀 빨리 출발했다.
원래는 춘천쪽으로 가서 저녁으로 닭갈비를 먹을까도 했는데
목도리 때문에 내가 우겨서 다시 같은 길로 왔다.
6 번국도로 갈아탄 뒤 그 휴게소.. "여기가좋겠네" 를 지나쳐버리지 않기위해
도로 반대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명 비발디 파크 표지판이 보이고, 용문지역에 들어선 후 드디어 그 휴게소를
찾았다. 비상등 켜고 도로옆에  차를 세운 후 안그래도 졸려하던 친구 보고
한잠 자라고 한 후 차에서 내렸다.
..
그런데 문제는, 휴게소는 백여미터 뒤쪽 길건너편인데
4 차선 도로 가운데에는 가슴높이의 중앙분리대가 쳐져있다. 어떻게 넘어가지..
앞쪽으로는 멀리 터널이 보이고 그터널까지 분리대가 이어져 있어서
도저히 갈수가 없다.  뒤로는 멀리 산모퉁이로 휘어진 곳까지 계속 분리대가 있다.
서울로 귀경하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시속 100Km 가까이
쌩쌩 달린다.  내쪽 도로에 차가 뜸한 사이 재빨리 뛰어가 분리대를 넘은 후
분리대에 바짝 몸을 붙이고 있다가 반대편 차가 뜸할 때 다시 도로를 건널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너무 위험했다. 분리대가 있는 공간이 너무 좁고
혹시 사고라도 나면.. 나는 자동차들 바퀴에 의해서 몸이 반죽이 되어버릴꺼다.
마치 내가 몇시간 전에 입에 넣었던 빙어 처지가 될게 뻔하다..
내가 다치지 않더라도 자칫 급브레이크 밟은 차들이 엉켜서
대형교통사고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경찰 감시카메라가 있을지도 모른다. 건너편이 휴게소니까..
..
일단 도로 아래쪽 휘어진 쪽으로 무작정 내려갔다.
한 500 미터 걸어서 산모퉁이를 돌자  도로 아래 조그마한 굴다리가 있었다
다행이었다. 휴게소에 도착해서 오전에 들렸던 그 식당에 갔다.
목도리를 걸어놓았던 그 의자에는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아직 그대로 있을리 없지..
식당 주방쪽으로 가서 아주머니에게 오전에 혹시 갈색 목도리  못봤냐고 물었다.
아 그거.. 하면서 탁자아래 손을 넣어 꺼내준다.. 내 목도리 맞다.. 
아..  찾았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가벼워진다.. 반갑다..
고맙다고 인사한 후 다시 한참을 차들이 씽씽 달리는 길을 돌아서 차로 돌아왔다.
그동안 운전석 의자를 완전히 뒤로 젖혀서 얼굴에 모자를 덮은 채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친구녀석은  ..찾았다..면서 앞문을 열고 입이 귀까지 찢어진
내 얼굴을 보는둥 마는둥 별 관심없다는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는
깜빡이를 켜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냥 혼자 좋았다..
넓은 한강이 길옆으로 도도하게 흐른다..
발갛게 변한 둥근 태양이 커다랗게 부풀어서 산으로 내려앉는다.. 아름답다.
..
정말 인연을 시험한 거였을까?
잃어버릴 뻔한 목도리..
끊길 뻔한 인연..
마주잡은 작은 손에 만족하고.. 마음에 담지는 말자고 다짐했지만..
아직도 해야할 일이 남았다는건 분명하다고..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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