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정상

어떤 오해

권성재 2008. 1. 10. 22:46
[어떤 오해]

며칠전 포근한 겨울날씨로 서울 하늘이 하루종일 온통 뿌연 안개로
뒤덮혔던 날 밤이었다. 늦은 저녁을 좀 많이 먹었던지 영 속이 거북하고 소화가 안되서
9 시 뉴스 보고는 간단하게 단도리하고 동네 한바퀴 산책을 할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귀에는 MP3 플레이어도 꼽고.
..
밤이 깊어가도 여전히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주택가 어귀 주차장에 주차된 자동차에 밤안개가 내려앉아
차유리가 뿌옇게 변했다. 가까이 가서 손가락으로 문질러보니
물기가 아니라 얇은  얼음이있다. 기온이 내려가면서 대기중의 수증기가
서리로 변해서 유리창에 얼어붙은 것이다.
생각보다 밤공기가 차서 마스크를 하고 나올걸 하는 생각을 하면서
노래 들으며 아무 생각없이 골목길을 거닐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사람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돌렸다.
..
"아저씨 이 근처 사세요?"
"예 그런데요?"
"제 차를 들여다 보시던데 여기서 뭐하세요?"
"..예?"
..
이게 무슨 뜸금없는 소린가? 자기 차를 들여다 봐?
가까이 와서 보니 짧은 스포츠머리에  유도선수같은 빵빵한 근육질의 건장한 체구의
아저씨였다. 깍두기 같지는 않았고 학교 체육선생이나 새벽에 동네공원에서
역기들면서 운동하는 동네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어떤 낯선 남자가 주차된 고급차들을 들여다 보면서 어두운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리는 걸 수상하게 생각했단다.
더구나 노인이나 여자, 어린애들만 사는 집도 많은 서민들 동네다 보니
혹시 자동차나 집을 털려고 돌아다니는 절도범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단다.
그게 아니라.. 나도 바로  요 근처에 살고 있는 주민인데.. 산책하러 왔다가..
차유리에 낀 서리 때문에 .. 이거 참..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암튼.. 나 "그런 사람" 아니라는걸 증명해줘야 할 거 같아서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 놓아야만 했다.
..
직접 가까이서 얼굴보고 얘기 들어 보니 의심이 풀렸던지 이번에는
그 남자가 한참 변명같은 걸 늘어놓은 뒤 미안하다며 멋적게 웃고는
뒤돌아서 갔다.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좀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래도 저런 의협심(?)있는 사람이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게
그리 나쁠건 없다는 생각도 해봤다.
황당과 당황, 두가지를 동시에 느낀 어이없는 경험이었다.
..
그러고 보니 내 행색이 오해를 살만했다.
운동화에 체육복 차림, 칙칙한 외투, 눌러쓴 모자..
범인 몽타주에 흔히 나오는 딱 그런 차림으로 늦은 밤 인적없는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주차된 차들을 흘끔거렸으니 누가 봐도 수상하게
여겼을 법 했다.
결국 내가 자초한 일이다. "내 탓"이었다.
..
..
이번 오해는 그 자리에서 풀렸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적지않은 세월 살아 오면서
그동안 나도 모르게 신중치 못한 언행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마음 한자리를 불쾌한 기억으로
채워 준 적이 얼마나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순수한 오해라면 그나마 변명의 여지라도 있어서 억울하다며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상황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오해"라는 것이 엄밀히 따지고 보면
부주의, 게으름, 상대에 대한 무시, 만만함, 거드름, 경솔함 등이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어떤 조직에 들어가거나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되면 누구나 긴장을 하며
냉정하고 합리적이며 공손하게 처신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점점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서로 친해진다고 느끼게 되면서부터는
"관계의 편안함"에 비례해서.. "오해의 가능성"도 점점 높아간다.
어쩔 수 없이 서로 부딪히고 상처를 주고 받으며 맘앓이를 하게 된다.
이른바 "인간관계의 지뢰밭"을 지나며 터져버린 파편이 만들어낸 흉터를
수도 없이 가슴에 안고 살아가게 된다.  누구나..
..
신독(愼獨) ≒ "처음처럼"
..
그 지뢰밭 통과요령을 "먼저 간" 사람들에게서 수없이 듣고 봐 왔는데도
그게 참 어렵다. 어렵다기 보다는, 어쩌면 약간의 주의만 기울이면
별 문제없을 일을 오히려 너무 쉽고 편하게 생각해 버려서
결국 잘못 판단하고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하게 되는거 같다.
일단 마음의 상처가 되어버리면 그걸 치유해 주는 건 상처를 낼 때 보다  
몇십배 더 어렵거나, 기회가 사라져서 아예 불가능해져버릴 수도 있다.
..
과거에 만났던 인연들..
현재 맺고 있는 인연들..
그리고, 미래에 얽히게 될 인연들에게..
내가 저지른,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혹은 앞으로 저지르게 될 "어리석음"에 대해
연초를 빙자해서, 또 하나마나한 "반성문"을 써본다.
..
그리고 소주는 "처음처럼"을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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