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출생의 비밀1

권성재 2009. 6. 30. 16:49
##### 출생의 비밀1 #####

1970년대 초.. 동유럽 어느 도시 늦은 오후..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가 한적한 공원 모퉁이에
동양인 남녀 한쌍이 포옹을 하고 있다.
언제나 느끼지만 이 여인을 품에 안고 있으면 참 편안하다.
풍만한 가슴이 몸에 닿을 때 느껴지는 몽실한 느낌..
긴머리와 뺨에 코를 스칠 때 느끼는 향긋한 살내음..
이 여인 역시 남자의 넓은 어께와 단단한 근육의 팔힘..
그리고 왼쪽 가슴에 얼굴을 묻을 때 배어나는 땀냄새가 좋다..
마치 레고 조각이 서로 딱 들어 맞듯,
둘은 그렇게 한참을 서로 껴안고 있었다..
..
고개 들어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망울에
기울어가는 저녁햇살이 강물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그 반짝임이 눈물로 변해 뺨을 타고 흘러내리려는 순간
긴 침묵이 깨어진다..
..
"오빠야.. 우리 저 강에 띠 드러가 칵 주거뿌까?"..
"이 에미나이.. 머 잘못 쳐먹었네?.. 혼자 주그라우.."
..
이게 그들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대화였다..
북한 고위층의 자제였던 "철수"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연애질만 하다가 본국으로 강제소환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간첩잡기 게임에 충성경쟁 하던 남쪽 기관원 역시
해외 유학생의 빨갱이 흔적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쩔수 없이 "영희"도 강제 귀국당해서 혹독한 심문을 받는다..
다행히 평소 지인들에게 알려진 그녀의 "천진난만함"과.. 부모의 재력..
그리고 무엇보다..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 덕분에
간신히 크게 험한꼴 안당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주홍글씨 낙인을 받은 이상
이미 그녀는 국가에서도 버림받고 ..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상태..
더구나 갈수록 불러오는 뱃속에 든 자식의 앞날 역시 암담하기만 하니..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
무작정 서울을 빠져 나왔다..
터미널에서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간후 .. 다시 아무 버스나 갈아 타고..
그러기를 여러번, 아직 초가집이 남아 있을 정도로 외진 태백산줄기 외딴 마을..
논뚝 밭뚝을 지나 저 울창한 숲속에 들어가 목을 메어
흔적도 없이 삶을 마무리하려고 마음을 먹는데..
..
"어이.. 남의 밭에서 머하니껴? 감자싹을 다 밟아뿌면 어쩌니껴? "
..
열받아 식식거리면서 다가온 사내가 쏘아붙인다.. 그런데..
산골에서는 구경도 못해볼 비싼 양장차림의 한 여인이..
허깨비라도 본 것처럼 초점잃은 표정으로.. 남산만해진 배를 힘겹게 욺켜지고..
뭔가 말하려고 입을 움직이는거 같더니
그냥 밭고랑에 풀썩 쓰러져 버린다..
..
얼마전 젖먹이 팽개치고 마누라가 도망가 버려 열받아 있던 "오식"이는
그렇게 새장가를 가게 되고.. 덤으로 아들까지 혼수로 얻게 된다..
모든걸 잊어버리고 새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얻은 영희와
투철한 새마을정신으로 무장한 오식은.. 황소같이 열심히 일해서
평범하고 단란한 삶을 살아간다..
..
어느덧 세월이 흘러..
어릴 때부터 영특함이 남달랐던 그녀의 아들 K군은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교에 합격한다.
오식은 돼지를 잡아 연일 동네잔치를 벌이고
잔뜩 취해 자식 자랑이 끝이 없다..
하지만 평소 골골거리던 K군의 어머니 영희는 기뻐함도 잠시..
쓰러져 눕게되고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된다..
아들이 서울로 가기 전날 밤,
K를 홀로 불러 평생 가슴에 담아 두었던 출생의 비밀을 알려준다..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라지만.. 어른도 감당하기 쉽지 안은 충격적인 사실에
감수성 예민한 K의 머릿속은 터질듯이 어지러워진다..
..
대학생활은 혼란함의 연속이었다..
뭘 해야 할지.. 뭘 할 수 있을지.. 뭐가 가치있는지..
나는 뭐고 .. 삶이란게 뭔지..
데모 때문에 걸핏하면 휴강한다.
그걸 핑계삼아 그냥 술로만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한밤중에 자취방으로 심상찮은 분위기의 한 남자가 찾아온다..
..
한달 후..
그 남자가 마련해준 위조 신분증과 여권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북서부 니이가타항에서 출발하는 북한 여객선 만경봉호를 타고
원산으로 들어간다.
과연 이게 현명한 결정일까?
동해 한가운데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마음이 착잡하다..
하지만 평생 답답함에 짓눌려 사느니 당장 죽더라도 그 응어리를
풀고 싶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본다..
..
원산에 도착해서 미리 나와있던 인사들의 안내를 받아서
기차로 한나절 가까이 달린 후 다시 승용차를 갈아타고 평양시내를 달렸다..
그림같이 정돈된 건물들이 대동강변으로 웅장하게 솟아 있다..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건가..
..
검문소 정문을 들어선 후.. 대도시 한복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울창한 숲속 길을 한참 달려 어느 건물앞에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한 방으로 안내되어 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리라고 한다..
천장이 높다.. 벽에는 혁명그림들이 걸려있다..
도시의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아 조용하다.
긴장이 된다..
..
한참 후..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초로의 노인..
저 사람이 어릴 때부터 배워온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
"북한 괴뢰정부"의 우두머리란 말인가..
또한 이 세상에 남은 나의 마지막 혈육..
흰머리에 듬성듬성한 머리숱, 깊게 패인 주름살.. 불룩 나온 배..
미간을 약간 찌푸려 노려보는 듯한 시선으로 내 앞에 와서 걸음을 멈춘다..
..
"니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
피는 물보다 빨갛다고 했던가..
그를 처음 보는 순간.. 소리가 같은 파장에서 공명하듯..
육체속 유전자들의 울림에서 내 핏줄임을..
나를 낳아준 아비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또한.. 저 남자가 내 어머니를 버리고 나를 버린 그 비정한 사람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
..
"한평생 한많은 삶을 고통스럽게 살다가신 불쌍한 내 어머니와
태어나 한번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며 살아온 내 삶을
보상받고자 찾아왔습니다."
..
"그 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미안하다. 내가 면목이 없구나..
이제부터 호부호형을 허락하노라.."
..
"감사합니다. 하오나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데
호부호형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
"그래 그러니까 호부호형을 허락한다니까?"..
..
"고맙습니다. 그러나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한다면
호부호형인들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
"알았다니까.. 그래서 호부호형을 허락한다잖느냐"
..
"하오나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
..
"이런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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